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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일기

[도서] 가족공부

DAJI 2023. 6. 24. 07:05

 


동양의 고전 《주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행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고사성어에서 조선시대의 생활 윤리였던 ‘어려운 사람을 위해 베푸는’ ‘적선(積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주역》의 ‘계사하전’ ‘곤패(困卦)’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온다.’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 왔다면 얼음이 어는 겨울이 머지않았다는 뜻이죠. 서리가 내리기 전에 얼음이 어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쌓여서 이루어집니다. 한 가족의 갈등과 고통은 일정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가족에게는 이미 서리가 내렸던 것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얼음이 어는 겨울에 도달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상처가 아니고, 누군가의 일방적인 문제만으로 발생하는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통찰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은 수많은 선택과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로 인해 쌓인 성공의 경험들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는데, 이 여성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자녀들을 학대하는 엄마도 종종 존재하지만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녀에게, 특히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푼다고 착각하는 모성애 중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성애 중독은 딸에게 아주 깊은 손상을 남기는데, 딸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정체성은 내 안에 있는 욕구와 감정, 이를 통해 표현되는 자기주장을 형성합니다

자기주장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 기술이 발달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딸의 행복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희생할수록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딸이 배우자의 대체물이거나 충분히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자기 분신에 머물면서 엄마의 운명을 답습한다는 사실입니다. 엄마는 딸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지만 그것이 지난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자기를 돌보는 행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엄마가 간직한 모성애 중독의 성향을 인지해야 합니다.

모성애 중독을 인지했다면 엄마와 딸 사이에 일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삼각관계 안에 놓인 자녀를 가족심리학에서는 ‘가족희생양’이라고 일컫습니다. 어느 하루, 한때만 가족을 위해 중재자 역할을 떠맡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유년 시절이나 성장 과정 내내 부모 눈치와 분위기를 살피고 지낸다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경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결의 시작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긴장과 불안이 올라왔을 때 자동적으로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습관’을 줄이는 것입니다.

대화의 단절, 공감의 부재, 가장 무거운 학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공감해줄 수 있는 아버지의 역할은 대체 불가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오늘 아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맞춘 시간은 얼마였는지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깨닫는다면 보이지 않는 상처가 진행되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공존의 능력, 저절로 향기를 풍기는 꽃 같은 존재 공존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험난한 오이디푸스 시기를 잘 극복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는 ‘싫지만 좋은’ 이 양가감정을 수습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실수해도 즉각적으로 보복하기보다 용서하고, 또 다른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 주변 사람은 저절로 이러한 아이를 알아봅니다. 이 아이에게 있는 내면의 힘을 느끼고 편안해 합니다. 이런 아이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건강하고 성숙된 자아를 지니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단순하게 아들과 아버지가 관계 속에서 엄마를 놓고 싸우는 수컷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인즈 코헛*은 “공감의 부재야말로 성격장애를 야기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스콧 펙**은 “어린 시절 겪은 공감의 결핍은 살아가는 동안 자기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는 신경증 환자로 만들거나 반대로 자기 이외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성격장애자로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밀러는 나아가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줄 수 있겠냐.”고 되묻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거의 대화할 기회가 없었고, 전혀 공감받지 못한 아들은 고통스럽게도 아버지와 똑같은 삶을 반복한다는 사실.

인간관계를 움직이는 두 가지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의 한쪽 날개는 애착이고, 다른 날개는 독립입니다. 두 날개는 서로 상반돼 있습니다. 지나치게 애착하면 스스로 설 수 있는 독립심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자기 삶을 고집하면 타인을 향한 애착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상상을 끄집어내면서 자기 탓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시간이 반복되다 보면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혀 부모가 전혀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커집니다.

오직 지난날 아버지에게 충족하지 못한 결핍을 해결해줄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배우자 선택은 비슷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끼리 이루어진다

사티어는 “우리의 배우자 선택은 언제나 비슷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끼리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억울하게도 어린 시절 받은 상처 때문에 수많은 아픔을 경험하고, 자존감에 생채기가 났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그 그늘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진 미해결의 문제를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매듭지으려고 애쓰지만, 문제는 이전 세대 부모의 인생에 현재가 끊임없이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알아야 합니다. 내 내면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 부모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그로 인해 배우자 선택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먼저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처와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대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은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의 가장 큰 후유증은 바로 그 믿음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상처는 자존감을 약화시키고 정체성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합니다. 상처는 누군가에게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자아분화는 조금 쉬운 말로 ‘자존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아분화가 높다는 것은 타인, 가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인 아버지가 아내를 지지하고 사랑을 쏟는다면 엄마는 정서적으로 평온해지고, 무엇보다 아들만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폐쇄적인 모자 관계는 개방성을 가지고, 아들은 엄마를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에 “자신을 미워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죠.

부모에게 겪은 경험으로 인해 잘못된 배우자를 선택하는 몇 가지 이유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두 번째 화살을 조심하라고, 언제나 치명상은 첫 번째 화살이 아니라 두 번째 화살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불행이라는 상처를 통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자녀는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스스로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수치심, 죄책감, 분노, 우울, 무기력 등으로 무장한 두 번째 화살을 겨누고, 자기에게 쏜 화살로 인해 자존감에 생채기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손상된 자녀는 결국 자신과 비슷한 자존감의 상처를 지닌 배우자를 선택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것이죠.

“우리는 나와 닮은 배우자를 만나 과거의 집으로 돌아간다.”

부부가 품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문제를 분리하는 핵심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지사지입니다.

공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힘은 바로 소통입니다.

부부 사이에 반드시 피해야 할 네 가지 소통 방식 존 가트맨


첫 번째 피해야 할 소통 방식은 ‘비난’입니다. 비난은 남편보다 아내에게 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된 사람이 그래요?” “당신은 왜 항상 그런 식이죠.” 아내 입장에서 남편에게 불만이 쌓여 무심코 비난하면 남편은 곧장 미안하다고 수긍하지 않습니다.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일쑤이죠. 그렇게 두 번째 잘못된 소통 방식인 ‘방어’ 단계로 넘어갑니다. 남편은 아내의 비난에 “당신은 그럼 잘한 게 뭔데?” “당신 잘못이지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부부가 이혼을 향한 지름길에 이르는 세 번째 소통 방식은 바로 ‘경멸’입니다.

경멸은 상대방에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됩니다. 아내가, 남편이 샐쭉한 입술, 일그러진 볼, 냉담한 눈빛만 보여도 배우자는 충분히 경멸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말 대신 전달되는 경멸의 몸짓과 무심코 내뱉은 무시의 말들은 배우자의 마음만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소한 경멸이라도 오랫동안 반복되면 배우자가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부부가 경멸의 의사소통을 주고받다 보면 백혈구 숫자가 감소해 면역력이 떨어져 잔병치레를 하거나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비난과 방어, 경멸의 소통이 이어지다 보면 마지막 단계인 ‘담쌓기’에 도달합니다. 담쌓기는 상대편을 마치 투명 인간 취급하면서 옆에 있어도 없는 존재로 여기는 상태입니다.

사소한 일상부터 호감과 존중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부부관계를 위한 소통을 회복하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소통을 회복하는 전제는 ‘담아주기’입니다.

‘담아주기’는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낸 아내에게 싫은 내색을 보이거나 꾸중하기보다 지금 아내가 손님맞이로 예민해졌다고 그 감정을 묵묵히 받아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통장에 잔고가 가장 많이 쌓이는 시점이 바로 부부가 호감과 존중의 대화를 주고받을 때입니다.

“내가 존중하지 않았는데, 내가 힘들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사람은 없다.”

자아통합을 이룬다는 것은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면서 부족했던 것들을 부둥켜안고 있기보다 수용과 통합의 자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통합을 이룬 부모에게는 지혜로움이라는 인생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부모에게는 무엇보다 관대함이 삶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노인이 지혜롭다고 느낄 때는 그 사람의 경험뿐만 아니라 주변의 삶을 유연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 경우에 더욱 와닿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관계가 좋은 부모는 자녀의 결혼을 ‘은퇴’로 여기고, 부부 중심의 새로운 인생을 2막으로 받아들이면서 서로에게 집중합니다. 은퇴를 뜻하는 영어가 ‘리타이어드(retired)’인데, 이러한 부모는 우스갯소리로 ‘다시 타이어를 갈고 달린다.’고 할 만큼 자신들의 독립된 삶을 재충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경제 활동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자녀에 대한 책임감도 사라졌기 때문에 온전히 부부관계에 집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와 갈등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겉모습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정서적인 독립과 분리의 완성인 것이죠.

우리 시대는 한 번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기회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주어지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질 수 있는 숱한 가능성으로부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20대 자녀가 내면에 숨긴 허기, 불안을 헤아리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소통은 점차 불가능해집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어떤 관계이든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와 골목을 잃어버린 스무 살은 이제 보이지 않는 세계와 겨루며 불안의 거울과 마주한다.”

육체의 질병은 ‘마음의 자가치료’ 행위일 경우가 많습니다. 상처를 숨기고 말문을 닫아버린 사람의 억눌린 감정을 몸이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와 소통할 때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에서 만들어진 선입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듯 호기심을 지니고 바라봐야 합니다.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에 갇혀 자녀의 세계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바라본다면 다른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희망과 가능성을 영원히 모르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바로 그 마음의 씨앗이 상처와 갈등으로 메마른 가족을 적시는 한 방울 봄비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2023.6.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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